Bruegel, “Tariffs, Deals and Multilateral Ideals" ‘트럼프 라운드’가 WTO의 근본 정신을 뒤흔들다 |
|
|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압박은 지난 20여 년간 세계 다자무역 확장의 주축이던 WTO(세계무역기구) 체제에 대한 근본적 훼손이다. WTO는 2차대전 직후의 브레튼우즈 체제에 이어 세계질서를 새로 구축하기 위한 오랜 협상과 타협의 산물이었다. 관세와 쿼터제 같은 무역장벽을 없애고, 하나의 국가가 일방적으로 무역정책을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 이걸 일방적으로 뒤집고 있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다. |
|
|
WTO 체제의 후퇴는 세계질서의 전면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제 WTO는 변화된 질서 속에서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명맥을 유지하면서 변모해 나갈 것인가? WTO에 참여하며 미국과의 양자딜에도 참여한 한국, 일본, 대만 같은 나라들에게는 사활적 관심사다. |
|
|
저명한 국제법 학자인 페트로스 마브로이디스(Petros C. Mavroidis)는 지난 10월 워킹페이퍼 “Tariffs, Deals and Multilateral Ideals: Can the World Trade Organization Survive?”에서 미국의 이러한 양자딜 중심 접근은 단순한 WTO 회피가 아니라, 사실상 새로운 통상규범을 재설계하려는 전략적 시도라고 분석한다. 마브로이디스는 컬럼비아 로스쿨 국제비교법 교수이자 WTO 규범·분쟁해결 분야 전문가다. 그는 미국의 조치를 “WTO 성립 이후 가장 큰 충격”으로 평가한다. 미국은 이제 WTO 체제 안에서 규칙을 손보려 하기 보다, 그 밖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이를 국제무역의 기본 틀로 삼으려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른바 ‘박스 바깥의 접근’이다. |
|
|
마브로이디스 교수에 따르면, 미국의 양자딜(Deals)은 ‘상호주의 회복’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전통적 상호주의와 다른 ‘조건부 상호주의’다. 전통적 상호주의가 다자규범을 기반으로 국가 간 균형적 의무를 조정하는 방식이었다면, 트럼프식 양자딜은 권력 비대칭을 활용하여 상대국의 규제·투자·공급망까지 포괄해 의무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WTO를 잉태했던 우루과이 라운드에 이어 트럼프 라운드라 불리는 이유다. |
|
|
마브로이디스 교수에 따르면 미국의 조치는 최혜국대우원칙(MFN, The Most-Favored Nation Principle), 양허, 통보, 분쟁해결에 걸친 네 가지 축에서 WTO 규범을 직접적으로 흔들며, 다자무역체제의 작동 지반을 약화시키고 있다. |
|
|
첫째, WTO의 기초 규범인 MFN과 직접적으로 충돌한다. 동일한 품목에 대해 국가별로 상이한 관세율과 조건을 적용하는 양자딜 방식은 MFN의 비차별 원칙을 무력화한다. 마브로이디스는 이를 “다자체제의 규범적 일관성을 침식하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국가별 차등 관세 구조가 관행화되면 WTO는 더 이상 모든 회원국에 동일 규칙을 요구할 수 없게 된다. |
|
|
둘째, 미국은 기존 양허표(bound tariffs)에 명시된 상한선을 초과하는 관세를 부과하면서도 이를 WTO에 정식 통보하지 않았다. 이는 다자체제의 핵심 가치였던 예측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을 훼손한다. 양허 초과가 제도적으로 용인될 경우, 다른 회원국의 준수 유인이 약화되며 그동안 축적된 다자 협상의 성과가 점진적으로 훼손될 위험이 커진다.
|
|
|
셋째, WTO 회원국은 새로운 무역 관련 조치를 시행할 때 이를 신속히 통보해야 하지만, 미국의 조치는 통보와 문서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브로이디스는 이를 “투명성 메커니즘의 의도적 약화”로 규정하며, 회원국 간 정보 비대칭이 확대되면 규범 감시와 분쟁 해결 기능이 사실상 무력화된다고 분석한다.
|
|
|
넷째, 상소기구(Appellate Body)의 기능 중단은 미국의 회피 전략을 가능하게 한다. 미국은 패널 단계에서 패소해도 상소를 제기함으로써 판정의 구속력을 무기한 지연시키고 있다. 이는 분쟁해결제도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회원국의 규범 준수 인센티브를 떨어뜨리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마브로이디스는 이를 “의도적”이라고 평가하고, WTO의 집행 기능이 제도적으로 취약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
|
|
미국 내에서도 위헌 논란 트럼프는 회피 경로 확보할 것 |
|
|
미국 내에서도 이러한 광범위한 관세 부과가 헌법상 대통령 권한을 넘어선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제비상경제권법(IEEPA)을 근거로 ‘국가 비상 상황’을 선언하고 사실상 모든 국가에 높은 관세를 일괄 적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 조치는 본래 의회의 권한인 관세 결정권을 대통령이 비상 권한으로 대체하는 결과를 초래해 헌법상 권력분립 원칙과 충돌한다.
|
|
|
또한 미 연방국제무역법원(CIT)과 연방순회항소법원(CAFC)은 과거 판례에서 ‘국가 비상 상황’을 전쟁이나 외교 관계의 단절과 같은 실질적이고 급박한 안보 위기로 한정해 해석해 왔다. 트럼프 방식은 비상 상황의 개념을 과도하게 확장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
|
|
국가안보를 근거로 한 ‘전략물자 통제’도 일관되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 반도체 규제는 비교적 명확한 안보 논리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같은 명분을 사용하면서도 기업의 요구(Nvidia의 H20 칩 수출 허용)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등 기준이 흔들리는 사례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조치는 미국이 주장하는 “비상 상황” 요건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향후 법적 평가에서도 취약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실질적인 제약을 받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미국 법제에는 IEEPA 외에도 Section 122(최대 15% 관세, 150일 적용), Section 301(대상국별 맞춤형 제재) 등 다양한 우회 채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적 수단들은 특정 조치에 대한 사법적 제동이 가해지더라도, 다른 조항을 활용해 동일한 정책 효과를 유지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트럼프 정책의 핵심은 정책이 합법성이 아니라 결과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브로이디스 교수는 “대법원이 위헌으로 판단하더라도 높은 관세는 유지될 것”으로 본다.
|
|
|
결국 이러한 구조는 미국이 국내법의 회색지대를 활용해 관세·통제 조치를 지속할 유인을 높이며, 국제 규범과의 충돌이 장기화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다. 이는 WTO 분쟁해결 기능의 약화와 결합되면서 다자통상체제의 신뢰 기반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
|
|
미국의 요구 받아들인 국가들이
룰 위반을 묵인하고 승인한 것
|
|
|
2025년~2026년 사이 주요국이 미국과 연쇄적으로 양자딜을 체결한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고율 관세를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현실적 판단이 자리한다. 60개 이상의 국가가 일제히 고율 관세 대상이 되자, EU·한국·일본·ASEAN 주요국 등은 모두 미국 시장의 접근성을 유지하기 위해 개별 협상을 선택했다. 이러한 흐름은 각국이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사실상 미국의 WTO 비준수 조치를 묵인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국제사회가 기존 다자체제와 충돌하더라도 미국이 제시한 새로운 규칙에 편승하는 쪽을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
|
|
이 과정은 다른 방향의 균열도 초래한다. 미국이 양자딜을 통해 상호 관세를 설정하면, 그 딜에 포함되지 않은 제3국은 MFN(최혜국대우) 원칙이 침해되었다고 주장할 여지를 갖게 된다. 실제로 브라질·중국·캐나다 등은 미국의 조치를 MFN 위반으로 제소했다. 그러나 WTO 상소기구가 기능을 멈춘 상황에서 미국은 상소를 통해 판정의 발효를 무기한 지연시키는 이른바 ‘appeal into the void’ 전략을 활용할 수 있다. 분쟁 해결이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로 인해 다자무역 규범의 구속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
|
|
미국이 WTO 의무 회피하면서 회원국으로 남는 사태에 직면
|
|
|
WTO는 여전히 존재하며, 미국도 공식적으로 탈퇴 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 그러나 미국이 현재와 같은 통상 규범 태도를 유지하는 한, 제도의 회복은 구조적으로 제약된다. 상소기구 정상화, 규범 현대화 등 다양한 개혁 의제가 논의되고 있으나, 미국이 실질적 기여를 회피하거나 거부적 태도를 지속하는 경우 진전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WTO는 거버넌스 기능이 축소된 ‘잔존적 제도(residual institution)’로 남을 위험이 크다. 마브로이디스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 생각은 ‘오래된 레짐은 쓸모 없다’는 것이고 행정부 바깥에서도 WTO를 되살릴 수 있다는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는 “미국이 WTO 의무를 회피하면서 회원국으로 남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
|
|
WTO는 창설 이후 가장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다자체제가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더라도, 기존과 같은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은 점진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향후 국제통상질서는 다자·양자·지역주의가 중첩되는 복합적 구조로 재편될 것으로 보이며, 마브로이디스는 이 과정에서 WTO가 제한적 기능만 수행하는 보조적 체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그는 WTO가 아직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무역질서의 중심축으로 자리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로 논의를 맺는다. |
|
|
마브로이디스는 “다자간 질서를 되살리려면 주요 이해관계자들의 용감한 결단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까? 미국이 새로 내고 있는 길이 뉴노멀이 될 가능성이 크다. |
|
|
☑️ 양자딜이 고착될 경우 WTO 체제는 점진적 분절화(fragmentation)에 직면하게 된다. 회원국 간 적용되는 규범·의무·조정 방식이 상이해지며, 이로 인해 다자체제가 ‘공통 규범체계(common rulebook)’로서 기능하기 어려워진다. 협정에 서명하는 이유는 일관성(consistency)과 투명성(transparency) 확보를 위해서다. 하지만 미국은 물론 EU도 앞으로 당분간 구속력 있는 다자 국제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 마브로이디스는 미국의 양자딜 확산이 EU·CPTPP·RCEP 등 지역·메가 FTA와 상호작용하면서, 통상 거버넌스가 단일 제도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다층적 규범체계(polycentric trade governance)’로 이행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미 대규모 지역협정은 WTO보다 높은 수준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으며, 여기에 미국식 양자딜이 결합될 경우 국가들은 상황에 따라 WTO, 양자딜, 지역협정 가운데 가장 유리한 규범을 선택하게 되는 ‘선택적 구조(selective architecture)’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WTO는 기본적 공통 규범만을 제공하는 “최소 기능 체제(minimum-function regime)”로 남고, 규범의 심화·집행·제재 기능은 점차 양자·지역협정으로 이전되는 구조적 분업이 나타날 수 있다. 마브로이디스는 이 같은 다층적·분절적·선택적 통상 질서가 국제통상 거버넌스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키우는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협력 메커니즘을 실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한다.
☑️ 미국의 통상 전략이 양자 중심·조건부 상호주의로 이동하면서, 한국이 의존해온 규범 기반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은 약화되고 있다. 미국의 관세·투자 조건은 국내 정치 변화에 따라 언제든 재조정될 수 있는 ‘정치적 관세’의 성격을 띠어, 한국에 구조적 위험을 높인다. 실제로 2025년 10월 발표된 한미 Joint Fact Sheet는 한국도 미국식 양자 프레임 내에서 관세 조정·투자 조건·디지털 규범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협상 구조에 편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² 미국식 양자딜 패턴은 이제 한국의 실제 통상 환경에서도 직접 관찰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은 다자·양자·지역주의가 중첩되는 질서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전략산업·공급망·기술 규범이 통상정책과 결합하는 상황에서 단순한 규범 준수가 아니라 전략적 조정 능력, 정책적 유연성, 협상력을 동시에 확보하는 복합 전략이 요구된다.
미국식 양자딜이 통상규범의 실질적 패러다임으로 부상하는 가운데, WTO는 어떠한 제도적·기능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 지속가능성은 어떤 조건하에서 확보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
|
|
재단법인 태재미래전략연구원 media@fcinst.org 서울특별시 종로구 백석동길 224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