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경쟁의 분야가 신기술과 무역의 범주를 넘어 군사 안보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2012년 시진핑(习近平) 주석의 취임 이후, 중국은 국제 무대에서 점진적으로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이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를 향한 중국의 도전으로 분석한다.
도널드 트럼프 (Donald J. Trump) 미 대통령은 2017년 국가안보전략서에 중국을 자유주의 질서에 맞서는 “수정주의 세력 (revisionist power)” 으로 명시했다.² 정치적, 이념적으로 트럼프와 대치되는 조 바이든 (Joseph R. Biden) 대통령 또한 중국을 “국제질서 재편 의도를 가진 유일한 경쟁자”로 규정했다.³ 트럼프 2기에도 이러한 대중 기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세계적인 싱크탱크인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CEIP)의 아이작 카던 (Isaac B. Kardon) 중국 담당 선임연구위원이 발표한 보고서 “Memorandum on Reducing the Risk of U.S.-China Conflict in Maritime East Asia”는 미·중의 지정학적 이익이 직접적으로 상충하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군사 충돌의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고 경고한다. 설혹 두 나라가 충돌을 원치 않고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더라도 중국과 제3국의 갈등이 의도치 않은 미·중 간 전면전으로 번질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 이 보고서가 지적하는 위험 지역과 충돌을 피하기 위한 제언을 조명하고자 한다.
미 · 중 간의 타의적 군사 충돌 가능성
역사적으로 미국과 중국 간의 군사 충돌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총 두 차례 있었다. 양국 간의 직접적인 충돌이 아닌 제3국에서 일어난 전쟁에 이해관계가 얽혀 참전하게 된 경우이다. 카던은 현재의 동아시아에서도 미국과 중국이 직접적인 마찰이 아닌 중국과 제3국 간의 갈등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충돌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실제로 중국과 영토 및 영해 분쟁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동맹국이거나 전략적 협력국이다. 협력국의 안보 수호는 미국의 주요 목표 중 하나이지만 협력국과 미국의 국익이 항상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영토 및 영해 분쟁의 대상이 되는 암초나 작은 섬들은 수호 의지에 있어서 국가 간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 협력국들은 이를 양보할 수 없는 핵심 이익으로 보는 반면, 미국은 이를 분쟁 확대를 막기 위한 관리의 대상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은 이 인식 차를 파고 들어 영향력 및 관할권을 늘리는 회색지대 (gray zone)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색지대 전략은 상대 국가의 핵심 이익이 걸려있는 레드라인을 넘지 않으면서도 점진적이고 모호하게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켜 나가는 전략을 지칭한다. 처음부터 한계점을 크게 넘어 상황을 뒤집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즉각 대응하기 어려운 선에서 실질적인 이득을 취하고 진의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군사력을 사용해 자국의 관할권을 늘려 나가다가 확전이 되기 직전에 멈추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중국과 필리핀 간 영유권 분쟁이 회색지대 전략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중국은 필리핀의 배타적경제수역 (Exclusive Economic Zone, EEZ)과 겹치는 남중국해 일대를 자국의 영해로 편입하기 위해서 해당 지역의 암초나 무인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해경뿐만 아니라 민간 어선도 남중국해에서 필리핀 군경과 마찰을 겪고 있다. 2012년에는 필리핀 해군이 자국 배타적경제수역 내의 스카버러 암초 (Scarborough Shoal) 근처에서 중국 민간 어선의 불법 어업 활동을 제지하자 중국 해경이 개입하며 양국이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위기 상황을 인식한 미국이 중재에 나서면서 필리핀 해군은 후퇴했지만, 중국 해경은 지금까지도 암초 주변 지역에 대한 순찰을 늦추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스카버러 암초에 대한 실질적인 영유권은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중국 민간 어선의 불법 조업에 대한 필리핀의 미흡한 대응과 미국과 필리핀 간 의견 차이로 인해 중국의 실효 영유권 확대로 이어진 것이다.
중국의 회색지대 전략은 단순히 자국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하는 것만이 아닌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안보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미국은 협력국의 안보 수호를 보장하지만 그 안보의 범위와 기준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실제로 필리핀은 스카버러 암초를 영토의 일부로 보고 있으나 미국은 이곳이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스카버러 암초가 중국의 실질적 영유권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양국은 입장을 같이 하지 못했고 필리핀은 이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협력국이 미국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면 독자적인 행동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문제는 미합의 된 협력국의 과도한 대응은 중국과의 본격적 군사 충돌로 번져 미군의 참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중 억제의 딜레마
카던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 동시에 자국의 파트너도 억제해야 하는 “이중 억제의 딜레마 (dual deterrence dilemma)”에 빠지게 된다. 즉, 중국이 자신의 안보 협력국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협력국들이 갈등을 고조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게 설득하는 논리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는 미국의 동일한 정책을 중국과 협력국들이 서로 반대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메시지가 협력국에 대한 무조건적 지원의 신호로 해석된다면, 동맹국들이 오히려 더 과감한 행동을 취하게 되어 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다. 반면에 미국이 중국과의 교전을 피할 것이라고 해석된다면, 미국의 협력국 수호 의지가 감소했다는 분석으로 이어져 중국의 공세를 부추길 수 있다. 이중 억제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메시지가 중국에게는 동맹국 지지, 동맹국에게는 위기 감축 의지로 각각 다르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정책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 메시지를 중국과 동맹국이 각각 어떻게 해석할지 면밀히 고려해야 한다.
미 · 중 전면전을 피하기 위한 제언
카던은 미국과 중국 간의 전면전은 불가피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미국의 이중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미 지도부는 국익을 분명하게 정의하고 이를 정부 내 기관들과 공유해야 한다. 미국은 철저히 미국의 국익 위주로 동아시아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 (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와 같은 추상적인 가치는 미 정부 기관들 간 정책 일관성을 저해할 수 있다. 또한 중국과 분쟁을 겪고 있는 협력국과의 정책 조율도 어렵게 한다. 미 정부 기관들이 명확한 국익을 기반으로 상호 일치된 정책 결정을 내리게 된다면 중국에 분명하게 정책 우선순위를 전달하고, 위기 감소에 대한 의지를 표명할 수 있다. 고려해야 할 핵심 국익으로는 항해의 자유, 지정학적 조임목 수호, 평화적 분쟁 해결 등이 있다.
둘째,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조건부의 계산된 지원을 약속해야 한다. 그동안 미국은 동맹국과 협력국들에게 과도한 보호를 약속함으로써 무모한 행동을 부추겨왔다. 협력국의 주권이 위협받을 때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는 신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위협에 대해서는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반드시 위기 관리 노력을 기울이고 미국과 사전 조율을 해야만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전달해야 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동맹국들이 위기 상황을 적절히 관리할 수 있도록 작전과 전술 구축을 도와야 하며, 연합 훈련을 진행하는 한편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야 한다.
☑️ 현재 동아시아 역내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은 중국에 대한 유례없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중국의 회색지대 전략은 민 · 군 간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주변국들의 경계심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이런 움직임은 중국이 소기의 영유권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중국이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지역 균형의 수호자가 되려는 것이라면 미국을 쫓아내고 주변국들과의 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호 신뢰를 쌓아가며 주변국들을 침공할 야욕이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을 적대시하지 않게 된다면 미국도 일방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명분이 줄어들 것이고 양국 간의 경쟁도 완화될 수 있다.
☑️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경쟁이 냉전 이후 잊혀졌던 핵무기 경쟁으로 다시금 표출되고 있다. 중국은 2012년 시진핑 주석의 취임 이후 경제와 안보 분야 전반에서 영향력을 급격하게 확장해 왔고, 최근에는 핵무기 증강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 정부에 따르면 중국은 현재 600여 개의 핵 탄두를 보유하고 있으며 2030년까지 1,000개로 증강할 예정이다.
이에 대응해 트럼프 대통령도 미국 핵무기의 전면적 현대화를 주문하였으며, 미국 전역을 지킬 수 있는 미사일 방어 체계인 “골든 돔 (Golden Dome)”의 개발을 예고했다. 미국과 중국은 핵확산금지조약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NPT)의 일원으로서, 더 나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안정적인 핵 질서를 유지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무분별한 핵무기 개발을 억제하는 신전략무기감축협정 (New Strategic Arms Reduction Treaty, New START)이 내년 초 만료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 중국, 그리고 러시아는 협상 테이블로 돌아와 핵무기의 위험을 줄여나가는 데 협력해야 한다. 협력이 실패하고 핵무기 경쟁이 결국 도래한다면 미국 핵 우산의 보호를 받던 동맹국들의 핵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추가 위기 가능성을 고려할 때 주요 핵 보유국들의 올바른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미국과 중국이 긴장과 협력을 병존시킬 수 있는 ‘공존의 방식’을 만들어가려면, 어떤 전제 조건이나 신뢰 구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들의 의견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