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AI라는 거대한 변혁의 길에 이제 막 들어섰다. 19세기 말 전기가 그랬듯, AI는 21세기를 재편할 범용 기술(General-purpose technology)로 부상 중이다.¹ 일부 분야에서 AI가 인간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거대한 데이터가 필요한 분야에서는 이미 인간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AI 핵심기술이 빅테크에 집중되면서 세계적 불평등 심화에 대한 우려도 깊어지고 있으나, 다른 한편에선 개발도상국과 빈곤국의 삶의 질 개선에 AI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세계은행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개발도상국의 농업, 의료, 교육, 금융, 에너지, 인프라 및 데이터 등 7개 필수 분야에 적지 않은 자금과 인력을 투입해 왔다. 그러나 구조적 변화를 불러오는 데는 어려움을 겪어왔다. UN의 지속가능개발목표(SDGs) 2023년 평가에 따르면, 세계는 현재 지속가능개발목표의 30%에서 정체되거나 오히려 역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최근 AI 혁신 기술을 현지 데이터에 접목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에 없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빈곤국 개발지원 분야에서도 AI가 기존의 접근방식을 바꾸는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은행 'World Development Report 2024'²의 기초 연구보고서에 해당하는 “AI, the New Wingman of Development”³가 이를 뒷받침한다. 보고서는 개발도상국 19억 인구의 삶을 변화시킬 AI 기술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AI를 통한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좀 더 많은 자금을 AI에 투입할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보고서 제목에 담았듯 AI를 ‘개발의 새로운 윙맨’으로 표현했다.
농업에서 금융까지: AI가 바꾸는 개도국 19억 인구의 삶⁴
[농업 : 전문가보다 정확한 AI로 생산성 혁명 ] 전 세계 식량의 3분의 1을 생산하는 소농의 84%가 개발도상국에 집중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도상국의 농업 생산성은 지난 50년간 거의 올라가지 못했다. 선진국과의 농업 생산성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으며, 단순한 경제적 불균형을 넘어 전 세계적인 식량 공급 불안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기후 변화, 물 부족, 인구 증가 등 복합 위기 앞에서 개발도상국 농업의 혁신적 변화가 시급한 상황이다. AI는 개발도상국 농업에 핵심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첫째, AI는 ‘맞춤형 농업 자문역’으로 생산성과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 ‘코튼에이스(CottonAce)’라는 앱은 현지 맞춤 해충 관리로 농가 수익을 24% 증가시켰다. 농업에서 농약을 적시에 살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최적의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농부들에게 오랫동안 어려운 과제였다. 코튼에이스는 현지 데이터를 기반으로 농약을 살포할 적절한 시기와 양을 농부의 스마트폰으로 제공한다. 이러한 AI 기반 농업 관리 기술은 선진국에서는 이미 일반화되었지만, 개도국에서는 이제 막 도입되기 시작한 혁신 기술로, 농업 생산성과 농가 수익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둘째, AI는 작물 손실을 최소화한다. AI 기반 앱 '누루(Nuru)'는 전문가보다 정확하게 작물 질병을 식별할 줄 안다. 질병 조기 발견과 적시 대응이 가능해져 수확량 손실을 줄이고 농가 경제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
셋째, AI 기반 자원 관리 시스템은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인다. ‘킬리모(Kilimo)’의 AI 관개 시스템은 데이터 분석으로 최적 물 사용량을 제안한다. 이 시스템으로 수확량은 20% 증가하고 물 사용량은 27% 감소했다. 이는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한 개발도상국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혁신적 솔루션이다.
[교육 : 100년의 격차를 극복할 학습혁명가 AI] 교육은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의 근간이다. 교육 불평등은 경제 불평등으로 직결된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⁵에 의하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교육 격차는 100년에 달한다. 개발도상국의 초등 교육 취학 기회는 증가했으나 교육의 질과 기회 격차는 여전하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저소득 국가 초등학생의 94%가 기본 읽기 능력을, 87%가 기초 수학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교사 부족, 제한된 교육 자원, 불평등한 교육 기회, 낮은 학습 성과는 단순한 교육 문제를 넘어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AI는 이 거대한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돌파구를 제시한다. 첫째, AI는 개인화된 맞춤 학습을 가능케 한다. 인도의 '마인드스파크(Mindspark)'는 개인 능력에 맞춘 학습 최적화로 교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둘째, AI는 고품질 교육을 저비용으로 제공한다. '코니에이블(CogniAble)'은 AI를 활용해 자폐 아동에게 맞춤형 언어 치료와 특수 교육을 제공하여 개발도상국의 특수 교육 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한다.
[의료 : AI로 제한된 의료 자원 최적화] 오늘날 세계는 급속한 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지만, 세계 의료 서비스의 질과 접근성 격차는 여전히 크다. 세계보건기구(WHO) 자료에 따르면,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간 의사 수는 30배, 의료비 지출은 13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의료 서비스 품질도 큰 격차를 보이는데, 아프리카 일부 국가 의료진의 진단 정확도는 75% 미만, 임상 지침 준수율은 45% 미만에 그친다. 이러한 의료 불균형은 건강 지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기대수명은 18년, 영아 사망률은 10배 이상의 격차를 보인다. AI는 의료 불균형 해소에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먼저, AI는 질병 발생을 예측하고 조기 진단이 가능하다. 멕시코의 '프로스페리아(ProsperiA)'는 AI 망막 검사 자동화로 시력 손상이나 실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망막병증을 조기에 발견해 발병률을 낮춘다. 둘째, AI는 제한된 의료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해 의료 취약 지역에서도 전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AI 기반 의료 영상 기술(DICOM)은 인구 100만 명당 방사선 전문의가 2명에 불과한 저소득 국가에서 의료 격차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셋째, AI는 실시간으로 질병을 감시하고 예측해 공중 보건의 효율성을 높인다. '와드와니(Wadhwani)'의 AI 질병 감시 시스템은 디지털 정보 분석으로 질병 발생을 조기에 감지해 팬데믹과 같은 위기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다.
[금융 : AI, 신용대출 장벽을 낮춘다] 개발도상국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금융 소외 문제다. 맥킨지앤컴퍼니(McKinsey & Company)에 따르면, 약 15억 명의 개발도상국 인구가 공식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한다. 중저소득 및 저소득 국가에서는 성인의 13%만이 공식 금융기관 대출이 가능하며, 개발도상국 중소기업의 40%가 만성적인 자금 부족 문제에 직면해 있다. 금융기관에서 신용 평가에 활용할 데이터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AI 기술은 온라인 쇼핑 습관, 공공요금 및 전화요금 납부 내역, 소셜미디어 프로필, 위성 이미지 같은 데이터 분석만으로도 신용을 평가할 수 있어 금융 소외 계층의 접근성을 크게 향상시킨다. AI의 잠재력은 금융 인프라가 부족한 국가에서 두드러진다. 인구의 80%가 신용 점수가 없는 인도의 경우, AI 기술이 1,000억 달러 규모의 디지털 대출 시장을 창출하고, 3억 5천만 명의 신규 대출자를 창출하며, 대출 연체율을 33% 이상 낮출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핀테크 기업들은 AI로 개발도상국 신규 대출자 서비스를 확대 중이다. AI 금융 기업 ‘브랜치(Branch)’는 스마트폰 데이터 기반 AI 알고리즘으로 400만 명 이상에 서비스를 제공하며, 농업 핀테크 회사 ‘트레이브(Traive)’는 농업 데이터에 특화된 AI 기반 금융 서비스로 주목받는다. 이는 AI가 개발도상국 금융 소외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며, AI 금융 혁신의 가속화를 예고한다.
AI 시대, 개발도상국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 시급 AI 기술이 개발도상국의 발전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농업 생산성 향상부터 의료 접근성 개선, 교육의 질 제고, 금융 포용성 확대에 이르기까지 AI는 개발도상국의 고질적 문제들에 혁신적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 개발 기구들의 지원 정책은 이러한 기술 혁신의 물결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세계은행의 사례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계은행은 농업, 보건, 교육 등 다양한 개발 분야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지만, AI 기술을 활용한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2012년부터 2022년까지 세계은행의 헬스케어 분야 지원에서 AI 관련 프로젝트는 전체 투자액의 0.02%에 불과했다. 보고서는 AI가 가진 혁신적 잠재력을 고려할 때, 이는 심각한 전략적 오판이라고 보고서는 지적한다. 또한 독립평가그룹(IEG)에 따르면, 세계은행의 개발도상국 지원 사업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보이고 있는데, 문제의 핵심은 자금 부족이 아닌 접근 방식의 낙후성이다. 이에 보고서는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 개발 기구들이 이제 AI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개발 패러다임을 수립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