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중 ‘신질 생산력’의 개념과 내용을 가늠해 볼 만한 책이 지난 3월 중국에서 출판되었다. 『신질 생산력: 중국 혁신·발전의 초점과 내부 논리』다. 저스틴 이푸 린 북경대 신구조경제연구소장을 비롯한 중국의 경제학자와 기업인 20여 명이 대거 참여했다. ‘신질 생산력’이라는 중국의 새 발전 전략에 대한 중국 내부 논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²
“신기술 도입이 불가능한 시대”
이 책에는 국제관계와 관련된 ‘100년’이라는 장기적 시선과, ‘AI’로 상징되는 임박한 기술 임팩트가 깔려 있다.
우선 100년이다. 책에는 이렇게 묘사된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킨다. 20만 명의 의화단과 4만 명의 청나라 팔기군은 신병기로 무장한 2만 명도 안 되는 연합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8개국은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일본이었다. 저자들은 이후 100년의 국제 관계가 이 8개국의 관계에 따라 결정돼 왔다고 했다. 관계가 순조로울 때는 평화, 악화되었을 때는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G7은 여기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빠지고 캐나다가 포함되었을 뿐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균열을 낸 게 중국이다. 지난 100년 동안 G7(또는 G8)의 GDP 총합이 세계 GDP의 50%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었으나, 중국의 급성장으로 지금은 35% 수준으로 내려갔다. 저자들은 ‘미국이 중국을 경쟁자로 삼게 된 것은 외교와 소통의 실패가 아니라 중국 경제의 양적 변화가 세계 경제의 질적 변화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아가 ‘(앞으로) 세계 경제 지형에 새로운 질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미국의 견제라는) 방향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의 중국 견제를 외교로써 다소 완화할 수는 있지만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으며,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견제로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중국과 선진국 간 기술격차가 현저히 줄고 있고 일부 분야에서는 이미 넘어서고 있기도 하지만 신기술을 가져올 공간이 현저히 좁아지고 있다. 저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기술의 질적 변화를 불러올 만한 양적 도입이 불가능한 시대’로 가고 있다. 독자적인 창조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AI 특이점’의 영향
두 번째는 AI로 대표되는 기술 발전의 흐름이 기술과 산업만이 아니라 국제관계와 안보까지 직접적으로 좌우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인식이다. 말하자면 ‘AI 특이점(Singularity)’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들은 중국이 반도체 배터리 등 전략신흥산업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고 양자컴퓨팅 같은 첨단 기술 분야에서는 이미 무인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전략신흥산업 분야도 이제 외부에서 신기술을 도입하기 불가능해졌고, AI 같은 미래산업 분야에서는 스스로 창조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고 본다. 저자들은 ChatGPT, 일론 머스크의 스타링크 등을 거론하며 ‘새로운 생산성의 본질을 재검토해야 한다’, ‘새로운 생산력의 개발에 진전을 이루지 못하면 중국식 현대화는 더 큰 압박에 직면할 것’이라고 한다.
저자들은 이와 함께 유의해야 할 분야로 환경과 기후 문제를 들고 있다. 탄소 최대 배출국인 중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용이 점점 유지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스스로 창조하지 않으면 안 돼”
저자들은 “스스로 발명하고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산업과 기술이 이미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막대한 투자와 높은 리스크를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더불어 이들은 정부와 민간의 역할 분담을 강조한다. 시장 기반 기술 혁신이 우선이지만 정부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분야별 통일 수준을 높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로가 불분명한 부분은 시장에 맡기고, 방향과 경로가 이미 정해진 기본 혁신은 행정이 맡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이들은 이를 ‘시장 기반의 힘을 통합한 국가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중국 정부는 공식 보고서를 통해 신질 생산력을 ‘전통적인 경제 성장 및 생산 방식에서 벗어나 혁신이 주도하며 첨단 기술, 고효율, 고품질을 특징으로 갖는 새로운 발전 개념’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신질 생산력의 전략적 의미를 분석하는 데 집중한 저자 중 한 명인 왕용 북경대 교수는 ‘미국발 지정학적 긴장’³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신질 생산력으로 발표한 것 아니냐는 일각의 의문에 대해 일정 수준 영향이 있겠지만 핵심 요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신질 생산력은 중국의 내부적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혁신 전략이라는 것이다. 공급 측면에서는 더 이상 노동 및 자원 집약적 산업으로 효율적 경제 성장을 달성할 수 없음을, 수요 측면에서는 인민들의 요구가 물질적 풍요에서 삶의 질 추구로 변했음을 지적한다.
왕용 교수는 과거 중국은 무에서 유, 적은 것에서 많은 것을 추구했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그런 수준을 뛰어넘어 고품질을 추구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어 신질 생산력을 위한 혁신 원칙에 대해 설명한다. 혁신을 이룰 수 있는 주체로 ‘기업가와 과학자로 이루어진 시장’ 그리고 ‘국가 시스템에 기반한 정부’를 언급하며 혁신은 시장에 맡기고 정부는 투명한 시스템 구축 등 후방 지원을 맡아야 함을 주장한다. 혁신 전략으로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원천 혁신’(0→1)과 이미 있던 혁신을 추가로 개선해 내는 ‘개선 혁신’(1→n)을 언급하며 이 두 유형을 동시에 추구하는 투 트랙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한 가지 유형의 혁신에 집중할 경우 산업 공동화 및 양극화 심화(원천 혁신 집중 시), 원천 기술 부재로 인한 국가 경쟁력 약화(개선 혁신 집중 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신질 생산력에 기반한 혁신 과정에서 기업과 정부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기업은 치열한 시장 경쟁에 기반하여 다양한 혁신 요소를 발굴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하고, 정부는 국가 주도의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여 정책을 시행해야 함을 지적한다. 특히 정부의 정책 수행과 관련해 다섯 가지 주의 사항을 제시하는데, ▲보조금보다는 세제 혜택 활용 ▲보조금 지급이 필요하다면 명확한 기준 설정 ▲유연한 산업 정책 ▲정책 일관성 확보 ▲중국 산업 정책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 고려가 해당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