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공공 디지털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 중 하나다. 영국 정부의 디지털 컨트롤 타워에 해당하는 ‘GDS(Government Digital Service)’가 설립된 게 이미 2011년이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디지털 전환이 중앙정부를 넘어 일부 지방정부로 확산되며 공공서비스에 AI를 접목하는 움직임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표1. 영국 지방정부의 AI 도입 사례
‘토니 블레어 연구소(TBI, Tony Blair Institute For Global Change)’에 따르면 영국도 고령화, 대도시 팽창 및 지방의 위축이라는 세계적 변화에서 예외가 아니다. TBI는 영국 지방 상황에 대해 “고령화 주택난 등 난제는 산적한데 엔진은 멈췄다”고 표현했다.
TBI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영국 전역의 지방정부를 아우르는 ‘지방행정 AI 플랫폼’ 구축을 제안했다. 기존 지방행정 운영 체계가 한계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도시 관리와 시민 돌봄 전반을 AI 기반 시스템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이 플랫폼을 중심에 두고 시민의 일상과 밀접한 모든 지방 공공서비스 데이터를 통합해 연결하자는 구상이다.
지방세는 최고 수준으로, 지방정부는 파산 위기로
TBI는 영국 총리(1997~2007)를 지낸 토니 블레어가 설립한 연구소다. TBI는 2024년 5월부터 ‘Governing in the Age of AI’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보고서를 발간해 왔으며, 이 가운데 세 편은 영국 정부의 정책 방향 및 제도적 대응을 다루고 있다.
첫 번째 보고서는 국가 행정과 AI 통합을 다룬 ‘A New Model to Transform the State’였다.² 핵심은 총리 직속의 AI 미션 컨트롤 타워를 신설하여 기존의 분산된 AI 관련 역량들을 통합하자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일자리와 연금 문제에 대한 ‘Reimagining the UK Department for Work and Pensions’였다.³
TBI가 이번에 발표한 세 번째 보고서는 지방행정과 AI의 통합을 다룬 ‘Reimagining Local Government’다. 보고서는 먼저 지난 100여년간 영국 지방정부의 역할 변화를 짚는다. TBI는 “지방정부는 20세기 내내 국가 건설의 핵심 동력이었다”며, “급속한 산업화 속에서 공중보건 인프라를 정비하고 현대 복지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TBI는 한 세기가 지난 지금의 지방정부 운영 모델이 더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특히 2020년을 기준으로 봤을 때 2029년까지 매년 160억 파운드의 추가 재원이 필요하지만 이를 충당할 현실적인 대책이 없다. 많은 지방정부들은 중앙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 감소 속에 지방세를 사상 최고 수준까지 올렸지만, 폭증하는 복지 서비스의 수요로 인해 파산 위기에 놓여 있다.
또한 이런 재정 압박 속에서 행정 서비스는 갈수록 비효율적으로 되고 있다. 각종 서비스는 지연되고 대기 시간은 길어졌으며 주민 만족도는 하락하고 있다. 특히 고령화에 따른 복지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반면, 여전히 노동집약적인 행정 시스템은 그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2023년 기준, 영국 지방정부 예산의 64% 이상이 복지 분야에 투입되고 있으며 이 비중은 앞으로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비스 품질은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AI 입히면 영국 지방에서만 생산성 향상 14조 원”
TBI는 이런 구조적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해법으로 AI를 통한 지방정부의 ‘재구상 (Reimagining)'을 제안했다. 특히 중앙 정부보다 규모가 작은 지방정부는 AI 도구와 서비스를 테스트하기에 적합하고, 이를 통해 지역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TBI가 한 지방 의회와 협력해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AI를 통해 전체 업무 중 최소 26%를 자동화하거나 효율화할 수 있었고, 그 지역에서만 약 3천만 파운드의 생산성 향상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를 잉글랜드와 웨일스 전역으로 확대하면 연간 80억 파운드(14조 7천억 원)의 생산성 향상이 가능하다는 추정이 나온다. 이는 영국의 모든 가구에 연간 약 325파운드를 환급할 수 있는 수준이며, 총 3억 8천만 시간의 공무원 노동시간 절감 효과에 해당한다. 이렇게 확보된 여력은 시민 서비스 개선에 재투자될 수 있다.
TBI는 지방정부 혁신을 위한 핵심 전략으로 ‘DAIS(Devolved AI Service)’라는 새로운 기관의 설립을 제안한다. DAIS는 ‘지방정부 통합 AI 플랫폼’으로, 지방정부의 관료적이고 비효율적인 운영 모델을 개선하고 AI 기반의 돌봄, 육아, 고용 문제 해결을 지원하는 인프라 역할을 한다. DAIS를 통해 지방정부는 공동의 AI 기반 시스템에 연결되어 지역 맞춤형 행정 혁신을 추진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DAIS는 중앙 정부와의 단일한 협력 창구 역할을 수행하여, 지방정부별 AI 거버넌스의 프레임워크 구축을 지원하고 책임 있는 AI 채택 원칙 등 규제 채택 과정에 관여한다.
표2. DAIS 플랫폼을 통한 지방정부 혁신 모델
데이터 부족과 분산이 가장 큰 문제
TBI는 현재 상태로는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AI 전환(AX)’을 추진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양질의 데이터 부족이다. 현재 데이터는 디지털화되어 연결된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현장’에 흩어져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AI 도입의 첫걸음은 데이터를 표준화해 생산하고 이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또한 지방정부 간 협업을 가로막는 조직 간 칸막이, AI 에이전트 시장을 소수 공급업체가 지배하고 있는 구조, 리더십 부재와 관료주의 문제도 주요한 장애 요소로 지적됐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TBI는 DAIS가 AI 전환을 위한 생태계 조정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초기에는 중앙정부가 DAIS 설립 자금을 지원하고 지방정부들이 공동으로 참여한다. 이후에는 모든 지방정부로부터 구독료(이용료)를 받아 자립 구조로 전환하는 모델이다.
TBI의 구상은 간단하다. 행정 현장에서 사람이 일일이 평가하고 판단하는 업무를 AI에 맡기고 아낀 인력과 시간을 실제 시민 서비스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특히 돌봄, 육아, 일자리 연계 등에서 AI의 활용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TBI는 이를 두고, “낮은 가치의 조정 업무는 AI에 맡기고, 높은 가치의 돌봄에 집중하자는 접근”이라고 표현했다.
☑️ 디지털 전환이 전 사회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음에도 많은 기초지자체는 여전히 아날로그적 행정 방식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TBI 구상은 AI 시대의 정부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선행 모델이 될 수 있다. 특히 저출생과 고령화로 인해 지속 가능성 위기에 처한 한국의 지방정부에,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제시한다.
☑️ 2024년 기준 한국의 전자정부 지수(EGDI)는 0.9679로 전 세계 4위,⁴ 글로벌 혁신지수(GII)는 전 세계 6위다.⁵ 또한 정부는 정기적으로 정부혁신 종합계획과 디지털플랫폼 정부 추진 계획 등을 수립하고 추진 중이다. 이러한 지표는 한국이 디지털 인프라 구축 측면에서는 세계적 상위권에 속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공 서비스의 품질, 시민 대응성, 개방성, 공정성, 청렴성 등을 평가하는 OECD 정부 신뢰도 조사(2024)에서는 37.2%로 30개국 중 15위에 머물렀다.⁶ 이는 잘 구축된 디지털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시민이 체감하는 정부의 효용성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결국 디지털·AI 기반 행정을 시민 체감도 향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한국형 DAIS’와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
☑️ 한국 지방정부는 AI를 단순한 행정 효율화 수단으로 보는데 그치지 말고, 시민의 삶의 질을 직접적으로 개선하고 지방정부의 전략적 역량을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 이는 AI 시대의 흐름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AI를 통해 지역사회의 복합적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주체적 지방정부’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미다. AI 전환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거버넌스의 문제다. 공무원과 시민 모두의 업무 방식과 사고방식의 전환이 함께 이루어져야 지방정부가 불확실성 속에서도 대응력을 갖춘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다.
지방정부의 AI 전환이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지역의 지속 가능성과 전략적 자립을 이끌 수 있으려면 어떤 역량이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할까요? 여러분의 의견을 들려주세요.